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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이야기만 나오면 요즘은 모두 민감해지죠. "집값이 미쳤다", "투기꾼이 판친다", "재개발 구역만 노리는 사람들" 등등... 하지만 혹시 이런 부동산 현상이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현대의 부동산 용어들을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삶에 빗대어, 재미있게 풀어보겠습니다. 역사에 부동산을 입혀보는 시간, 시작합니다!
📍 조선의 강남? “성안 기와집 동네는 기득권의 상징”
요즘 아파트 시장에서 '강남'이 갖는 상징성은 어마어마하죠. 똑같은 평수라도 강남 아파트는 몇 억이나 더 비쌉니다.
그럼 조선시대의 강남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한양 성곽 안, 그 중에서도 종로, 인사동, 청계천 근처가 지금의 강남과 같은 고급 주거지였습니다.
- ✅ 성안 기와집 = 오늘날 강남 대장 아파트
- ✅ 초가집 밀집 외곽 지역 = 수도권 변두리 빌라촌
성안에서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골목에 집을 갖는다는 건, 곧 권력, 인맥, 정보의 중심에 있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몰래 성안 땅을 사들여 조선시대식 ‘재개발’**을 하곤 했습니다. 어때요, 지금과 너무 닮았죠?
💰 전세 & 월세의 조선시대 버전은?
전세는 없었을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조선시대에는 집을 빌리고 쌀이나 엽전으로 세를 내는 제도가 분명히 존재했어요. 이름하야 사농임객(士農賃客) 제도.
- 지주: 집과 땅을 가진 양반, 혹은 상류층
- 임객(賃客): 집을 빌려 사는 사람, 혹은 땅을 빌려 농사짓는 사람
예를 들어, 양반 김 씨가 종로에 집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세를 놓고 매달 쌀 두 가마니나 엽전 몇 냥을 받았어요. 지금으로 치면 전세 보증금에 월세를 붙인 반전세 형태죠.
🏗 조선의 ‘재개발 구역’은 어디였을까?

재개발이란 말이 근대 이후 생긴 단어이긴 하지만, 비슷한 개념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양의 북촌, 돈의문 근처, 혹은 송현동 같은 곳은 원래 빈민들이 밀집한 동네였지만,
화재나 역병 등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면, 권세 있는 이들이 그 자리에 기와집을 지어 새롭게 마을을 조성했죠.
▶️ 실제 사례: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한양의 일부 지역은, 전쟁이 끝난 후 고위 관료들이 몰래 사들여 저잣거리로 개발한 기록이 있어요.
말 그대로 조선시대 재개발 사업!
이들은 “그 터는 아무도 안 산다”고 소문을 퍼뜨려 땅값을 떨어뜨린 후, 조용히 사들이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현대의 기획 부동산과도 닮은꼴입니다.
👤 부동산 투기꾼? 조선에도 있었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부동산 투기꾼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들을 우리는 **‘전답거간꾼(田畓居間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골의 **논밭(전답)**이나, 몰락한 양반가의 집터를 싼값에 사들인 뒤, 시간이 지나 가격이 오르면 다른 사람에게 비싸게 되팔았어요.
▶️ 투기 방법의 예시:
- 관청에서 “이 지역에 새 시장(저잣거리)이 들어선다”는 정보를 미리 듣고 근처 땅을 매입
- 궁궐 인근 공사를 앞두고 외척 가문이 땅을 미리 사두었다는 기록
지금의 내부 정보 이용 부동산 투기, 입지 선점, 시세 차익 노리기와 판박이죠.
🏘 ‘신축 아파트’ 대신 ‘기와집 신축 붐’
지금은 신축 아파트 청약이 인기지만, 당시엔 새로운 기와집을 짓는 것이 그 자체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특히 사대문 안에서 한양도성 인근에 새로 기와집을 지어 파는 일은 조선판 분양과도 같았죠.
어떤 부유한 상인이 목재 장인을 고용해 한옥 3채를 지은 후, 양반들에게 임대해 꾸준히 엽전을 벌어들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 마무리하며
사람 사는 건 시대를 초월해 정말 비슷하다는 걸 느낍니다.
조선시대에도 좋은 땅을 선점하고, 집을 짓고, 빌려주고, 시세 차익을 노리는 부동산 투자의 흐름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아파트, 빌라, 오피스텔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욕망과 경제 논리, 조선의 기와지붕 아래에서도 숨 쉬고 있었던 셈이죠.
다음시간엔 ‘조선시대의 갭투자’나 ‘세도정치와 땅 투기’ 이야기도 풀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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